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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드시 광주의 그날을 기억해라
    반드시해라 2007. 12. 1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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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의 광주는 뜨거웠다.979년 12.12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집권한 전두환 군사정부의 도덕성과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민중의 열정적이면서도 처절한 몸짓으로  빛고을 광주는 너무나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그러나,이런 민중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지방폭도들의 불온한 움직임으로 규정짓고 다른 지역과의 모든 의사소통 통로를 단절시킨 후에 취한 군사쿠데타 정부의 움직임은 이후 피의 역사로 기록되게 되었다.광주를 시민들로부터 전두환 정부의 손아귀로 넘겨준 공수특전단의 화려한 외출......당시의 작전 암호명은 "화려한 휴가"였다.화려한 휴가의 댓가로 우리가 얻은것은 6.25 이후 처음겪은 처절한 동족간의 피의 엉김이었다... 그것도 대한민국의 군이대한민국 국민을 향한....그 날의 광주에서는 피해자만이 있었고 가해자는 다른 공간에서 축배를 올리며 자축하고 있었다.진압부대 역시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버린 또 다른 희생자였고 이후 정신적인 방황과 자살을 택한 이들도 다수있었다.










    영화 D-WAR와 동반하여 연일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는 당시의 광주의 실상을 나름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할수있다.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실제 희생자수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의문사와 실종자수가 워낙 많았고 당시 정확한 기록을 남길 만한 언론들이 침묵하고 또 침묵을 강요당하였으며군의 자료와 외신자료에 대한 의존도가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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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광주의 비극은 대한민국에 알려졌고,오히려 세계는 미리 알고 분노했다.이러한 시대적 상황하게서 서울대 박종철열사 치사사건이 발생했다.


    "탁"했더니 "억"했다는 말도 안되는 게그가 난무하고 '대공수사요원은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법정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서 주장한 상티나는 코메디가 신성한 법정?에서 공연되었다.박종철열사 고문치사사건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이어서 격렬한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었다.다수 많은 젊은 청춘들과 민주인사들이 군사정부에 의해 연행되었고 가혹한 처우가 뒤따랐다.이 와중에서 연세대 이한열열사가 정문앞 시위현장에서 직격 췌루탄에 의해 부상을 당하고 곧 인근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민주화세력과 군부간의 힘의 균형은 급격하게 무너졌고 민주화 열망은 더더욱 커졌고 군부세력의 아류인 노태우 전대통령으로 부터 6.23선언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그러나 이러한 민주화의 열망과 민주화를 향한 젊은 피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민주진영은 다시 DJ와 YS로 분열되고 차기 정권을 군사정권의 아류인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처럼 수많은 젊은 피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금의 단계로까지 끌어올렸지만 이러한 결과물만을 즐기면서 그 이면을 모르는 지금의 젊은 청춘들에게는 다소간의 아쉬움과 이러한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승리의 이면에 있는 많은 민초들의 희생에 대한 묵시적인 침묵 그리고 승리의 만찬에만 관심이 있었던 어용민주주의자들의 어설픈 눈속임과 결속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삶의 경로속에 녹아있었다고 생각한다면 나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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