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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의 소중한 화석으로 간직될 주한 미국 옛 공사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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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 정동 주한 미국 대사관저 내에 자리한 옛 공사관 건물이 1년여의 개축 공사를 마치고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1883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상한 세월 속에 수많은 변화를 겪어온 건물은 마치 오래된 화석처럼 우리 근대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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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접할 때마다 한 가지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전통이, 역사가 그들에게는 생활 속 가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지만 일제 시대와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겪은 지금, 너무나 많은 우리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한 번씩 어스름해질 무렵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 거리를 걷다 보면 여기저기 펼쳐진 예스러운 성당과 극장, 미술관, 대사관저의 풍경들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 일제 시대 때 일본이 궁 안에 멋대로 가로질러 만든 덕수궁 돌담길, 일본을 견제했던 고종 주변 가까이에 자연스레 형성된 미국, 영국, 러시아 공사관저…. 이곳엔 우리 근대사의 가슴 아픈 기억이 아스라이 남아 있다.
사진 아름드리 고목나무와 어우러져 자연의 일부가 된 옛 공사관 건물 뒤편 모습. 벽돌과 기와의 이색적인 공존이 눈에 띈다. |
이번에 미국 대사관저 내 옛 공사관이 새롭게 개축돼 공개된 일은 다시 한번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서울 정동에 위치한 주한 미국 대사관저는 1883년 조선 왕실이 외국인에게 매각한 최초의 부동산이며, 서울에 있는 여러 대사관저 가운데에 유일하게 한국 전통 건축의 양식을 지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당시 영국과 러시아를 비롯해 여러 나라들이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대사관저로 사용한 것과는 구별된다. 보통 외국에서 생활하는 외교관들을 위해 그들에게 익숙한 환경을 제공하고 자국의 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도로 자국의 건축 양식을 고집하는 것에 비하면 무척 특별한 경우다.
사진 내부 응접실. 1백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여러 차례 개축을 거듭해 왔지만 대들보와 서까래가 드러나는 전통 한옥 양식을 대체로 잘 보존하고 있다.
기록을 보면 1897년에서 1905년까지 공사로 있었던 호라스 알렌은 키가 6피트(약 180cm)가 넘어 천장 서까래에 머리를 부딪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천장이 낮아 실내에서 모자를 쓰고 있을 수 없으니 미국 본국에 천장을 높여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고. 이런 일화만 보더라도 당시 서양 사람이 한옥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생소한 경험이었을까 짐작이 간다.
건물은 대사관저로 쓰이는 본채와 오랫동안 공사관(공사의 사무 공간)으로 이용되다가 최근에는 영빈관(게스트 하우스)으로 쓰였던 별채로 나누어지는데, 이번에 1년여 동안의 개축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 곳이 별채에 해당하는 옛 공사관 건물이다. 지난 7월 27일 여러 언론 매체에 그 모습을 공개한 날, 과연 근대 우리 역사의 한 자락이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어 있을지 사뭇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
다섯여 차례의 개축을 통해 조금씩 변해 온 건물 |
무엇보다 1백 년이 넘는 긴 세월을 지내며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을 거듭해 왔지만 지금까지도 전통 한옥 양식을 대체로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 여간 반갑지 않다. 대들보와 서까래가 자연스레 드러나고 단아한 기와지붕 아래 은은한 창호문이 조화를 이룬 공간은 전통 한옥의 운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대궐처럼 넓디 넓은 공간으로 주위를 압도하지도 않으며 화려한 장식으로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한옥은 아담한 가정집처럼 따스하다. 아름드리 고목나무를 벗 삼아 고즈넉한 마당과 함께 자연의 일부가 된 모습은 서정적인 풍경화를 이룬다. 철제빔과 콘크리트 대신, 나무기둥과 흙으로 지어진 한옥 안에 중앙 난방, 에어컨, 배관, 조명 같은 현대적인 시설들이 설치돼 있다는 사실이 이채로울 뿐.
사진 주방 옆에 자리한 식당. 한옥의 양식을 살리되 내부 공간은 침실, 욕실, 주방, 식당 등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새롭게 구성하였다. |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공사관에서 영빈관으로 용도가 바뀌면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건물은 그만큼의 오랜 세월을 쌓아 왔다. 이곳이 여느 한옥과 다른 가치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건물을 자세히 둘러보면 전통 한옥과는 조금 다른 형태가 눈에 띈다. 붉은 벽돌이나 돌로 쌓은 외벽이 바로 그것.
미국 측 관계자 피터 바돌로뮤(Peter E. Bartholomew) 씨는 “벽돌은 개화기에 들어 널리 쓰던 재료로 한국 근대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부분이죠. 또 석조로 지어진 부분은 금고로 쓰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가공 방법은 중국인 기술자의 솜씨로 여겨집니다. 한 채였던 공간이 여러 채로 늘어나고 필요에 의해 금고를 만들고 사무실을 게스트 하우스로 변경하는 동안 세월을 따라 이곳도 조금씩 변화되어 왔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사진 게스트하우스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곳은 두 곳의 침실을 두었다. 한국식 가구와 서양식 가구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즉 이곳은 한국 근대사의 혼란스러운 변화를 구석구석 온 몸으로 기록해 내고 있는 셈이다. 시간이 더해지고 쌓여 새로운 흔적을 만들고 서양과 동양의 양식이 서로 동화되고 융화돼 이루어낸 소중한 역사적 공간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이곳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2004년 또다시 시대의 변화를 제 몸에 새기고 있다. 빗물이 새고 지붕에서 흙물이 떨어지고 기둥이 썩어 들어가는 상처들을 모두 치유하고 보다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문살과 창호의 문양까지 옛것을 그대로 복원하려 애썼지만, 그 소재는 한결 현대적인 것으로 교체되었다. 또한 응접실, 침실, 욕실, 주방, 식당 등으로 나눈 내부는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새롭게 구성되었다. 비록 한옥 안에 침대를 놓고 카펫을 깔고 소파를 놓은 모습이 다소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훗날 이것이 또 다른 문화와 전통의 근거가 될 수도 있을 터. 시간이 꿰매고 기우며 만들어가는 이곳의 역사가 아주 오랫동안 소중하게 보존되길 소망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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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사리빙 김주윤 | |
멋진 건축디자인과 인테리어디자인의 모습이 격동의 근대사속에서 대한민국이 어떤 세파속에 존재했는지
가늠하게 합니다. 다만 공간의 아름다움은 역시 돋보입니다.